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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고대 한반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고구려는 서기 전 1세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넓게 지배하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고구려는 어떻게 건국되고 발전했으며, 어떤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고구려의 건국: 부여에서 독립한 새로운 나라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성왕이라 불리는 주몽입니다. 주몽은 부여의 왕 해모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의 시기와 학대를 받아 부여를 떠나 압록강 중류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종족들을 융합하여 고구려 연맹체를 형성했습니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자신이 세운 나라를 고구려라 명명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고구려라는 국호는 큰 고을이라는 뜻으로, 주몽이 부여에서 독립한 새로운 나라임을 나타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에 대한 전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주몽은 어릴 때부터 활로 파리를 쏘아 맞힐 정도로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그러나 일곱 형제들은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고, 주몽은 친모와 함께 부여를 떠나게 됩니다. 그는 도망가다가 오랑캐족과 연합하여 압록강 중류에 새로운 나라를 세웁니다. 그리고 자신을 동명성왕이라 부르며, 오랑캐족의 소서노와 결혼하여 후계자인 유리왕을 낳습니다.
이 전설은 역사적 사실과 상이한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몽이 부여에서 독립한 것은 기원전 37년이지만, 소서노가 속해있던 오랑캐족은 서기 3세기 이후에 등장한 종족입니다. 또한 소서노가 알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온다는 이야기는 신화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따라서 이 전설은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성장한 후에 만들어진 창조신화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발전: 영토와 국력의 확장
고구려는 주몽 이후에도 국왕들의 적극적인 정복과 개혁으로 영토와 국력을 확장했습니다. 특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가 고구려의 전성기로 평가됩니다. 광개토대왕은 사방으로 영토를 넓혔고 요동 지방까지 진출했습니다. 또 남쪽으로 한강을 건너 백제를 쳐서 굴복시켰습니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정복을 이어받아 백제와 신라를 압도하고, 중국의 수와 당의 침략도 물리쳤습니다. 고구려는 제도적으로도 도교, 불교, 태학, 율령 등의 제도를 도입해 체계적인 국가를 운영했습니다. 백성들은 군주를 천제 지자라고 일컬으며, 스스로를 천제의 자손이라 여겼습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평가됩니다. 그는 391년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남쪽으로 진격하여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고, 한강 유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동예와 거란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을 정벌하여 중국과 접경하는 지역까지 확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복사적을 기록한 금동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워 역사에 남겼습니다. 이 비문은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 문화와 제도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아들로, 413년부터 491년까지 78년간 장기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정복을 계승하면서도 내정에도 힘을 썼습니다. 그는 도교와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도입하여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율령을 반포하여 법률과 행정을 개선했습니다. 그는 백제와 신라를 계속 압박하고,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에도 저항하여 고구려의 영광을 이어갔습니다.
멸망과 유산: 귀족연립정권체제로의 변화
고구려는 후기에 성립한 귀족연립정권체제로 인해 내부분열과 국력 약화가 일어났습니다. 6세기 후반부터는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공격을 받아 전선이 위축되었습니다. 668년, 고구려는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게 평양성을 함락당하고 멸망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고구려 부흥운동과 유민의 향방이 계속되었습니다. 발해, 강화도 고구려국, 금신국 등은 고구려의 유산을 계승한 나라들로 평가됩니다. 고구려는 한민족 전통문화의 뿌리로, 씨름, 온돌, 거문고, 고분벽화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고구려의 멸망은 당과 신라의 연합의 군사적인 원인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정치적인 원인도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5세기 중반부터 귀족들이 왕권을 제한하고 국정을 주도하는 귀족연립정권체제로 변화했습니다. 이는 왕권의 약화와 귀족간의 갈등을 야기했으며, 국가의 통일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한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당이나 신라와 결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가 668년에 최후의 수도였던 평양성을 잃고 멸망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은 한반도와 동북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반도는 신라와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동북아시아는 당과 발해가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발해를 세워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한민족 전통문화의 뿌리로서 살아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씨름이나 온돌 같은 민속문화와 거문고나 고분벽화 같은 예술문화를 남겼으며, 이들은 후대에도 계속 발전하고 보존되었습니다.
고구려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입니다.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멸망과 유산을 알아보면서 고대 한반도의 역사적 흐름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부분이며, 우리 문화의 중요한 원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