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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19세기 중반에 조선과 서양 열강 사이에 발생한 두 차례의 군사적 충돌입니다. 이 두 사건은 조선의 쇄국 정책과 서양의 개항 요구가 대립하면서 일어났으며, 조선의 국가 주권과 독립을 위한 결사적인 저항과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무엇인지, 이 두 사건이 우리 역사에 어떤 의미와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병인양요: 프랑스의 복수 원정
병인양요는 1866년 (고종 3년)에 병인박해를 명분으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투입니다. 병인박해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조선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과 통상 개방을 요구하며, 천진에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습니다.
로즈 제독은 처음에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진과 서강까지 순찰만 한 후 조용히 물러갔으나, 이내 전력을 보강하여 강화도를 침공하여 점령하였습니다. 프랑스는 책임자 처벌과 통상 수교를 요구했으나 흥선대원군이 거부하자 양측 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1866년 11월에 퇴각하면서 강화읍을 파괴하고 방화하였으며, 강화 이궁과 외규장각 등에서 각종 무기, 수천 권의 서적, 국왕의 인장, 19만 프랑 상당의 은괴를 약탈하였습니다. 병인양요에서 조선은 군사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지만, 외교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프랑스는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의도를 가졌지만, 이를 달성하지 못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미양요: 미국의 개항 압력
신미양요는 1871년 (고종 8년)에 미국이 일으킨 전투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은 1866년에 일본인이 조선을 통해 미국으로 가던 중 강화도에서 납치된 사건과, 1867년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강화도에서 살해된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조선에 대한 보복과 통상 개방을 목적으로 함대를 파견하였습니다.
미국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진에 정박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이에 분노하여 강화도를 침공하였으나, 조선 군대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양측은 강화도 전투에서 수차례 충돌하였으며, 미국은 최첨단의 군사 기술로 우세하였지만, 조선은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였습니다. 결국 미국은 강화도를 점령하였으나, 조선 정부와의 협상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신미양요에서 또한 조선은 군사적으로 큰 희생을 치렀지만, 외교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미국은 조선에 대한 보복과 통상을 개방시키려는 의도를 가졌지만, 이를 전부 달성하지는 못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군사력을 정비하고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의미와 영향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의 국가 주권과 독립을 위한 결사적인 저항과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이 두 사건은 조선의 쇄국 정책과 서양의 개항 요구가 대립하면서 일어났으며, 조선의 국제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인해 조선은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군비 개량과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신미양요 후에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이 일본과 첫 번째 근대적 조약을 맺었으며, 이후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순차적으로 개항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약들은 조선의 국권을 침해하고, 불평등한 관세와 관할권을 부여하는 내용이었으며, 조선을 열강의 간섭과 압력에 노출시켰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우리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입니다. 이 두 사건은 우리가 우리의 국가 주권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싸웠는지를 보여주며, 세계 역사의 흐름에 어떻게 적응하고 변화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 두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우리의 역사를 자부심 있게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