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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에는 고려 전기에 거란과 성공적인 담판을 지은 문신이자 외교가로 유명한 서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에 맞서 담판을 벌여 고려의 영토를 지키고 강동 6주를 확보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어떻게 거란의 장수를 말로 물리쳤을까요? 그의 외교 담판의 비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거란의 위협과 고려의 혼란

서희가 외교 담판을 벌인 배경은 993년에 일어난 거란의 1차 침입이었습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국과 한반도 북쪽 지역을 점령한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당시 중국에는 송나라가 있었는데, 거란은 송나라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란의 옆에 있는 고려가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면 거란에게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란은 고려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내며 사이좋게 지내자고 했지만,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교류할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이에 거란은 분노하고 고려를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993년, 거란은 소손녕이라는 장수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고려가 거란땅을 침범한 것을 벌하고, 거란 대신 송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국경을 지키던 고려군을 쉽게 물리친 소손녕은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내고,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전멸시킬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거란군의 기세와 항복 요구에 고려 조정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신하들은 여러 가지 대책을 내세웠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부 신하들 사이에서는 거란에 땅을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망설이던 성종도 화해하자는 의견을 따르려 했습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

다만 서희만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서희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던 외교가였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에 밝았습니다. 송과의 전쟁이 중요했던 거란에게 고려와 큰 규모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노련한 서희는 거란의 작전이 겁을 주어 송과 친한 고려가 쉽게 거란에 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임을 알아챘습니다. 소손녕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챈 서희는 성종과 다른 신하들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건 거란과의 협상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서희의 외교 담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서희는 고려의 대표로 거란군 진영으로 갔습니다. 서희가 소손녕과 서로 인사를 할 때였습니다. 소손녕은 서희에게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를 아랫사람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서희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뜰에서 절하는 것은 신하가 군주에게 인사하는 예법이오. 두 나라의 신하가 만나 인사하는 예법은 아니오.”라고 하며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소손녕의 거듭된 요구에도 서희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밀리면 협상에서 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와 대등한 예를 행하고 서로 마주 바라보며 앉았습니다.

 

소손녕이 먼저 말하였습니다.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땅은 우리 거란의 것이오. 그런데 그대 나라가 침범해왔소. 또 고려는 우리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소. 이 때문에 지금 이렇게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오. 그러니 만일 고려가 땅을 떼어서 우리 거란에게 바치고 우리와 교류한다면 물러날 것이오.” 이처럼 자기들이 고구려 옛 땅의 주인임을 내세우며 항복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서희가 대응하며 말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소. 고구려의 옛 땅이 곧 고려의 땅이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 하였고,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을 고려의 수도로 삼고 있소. 또한 그대 나라가 말한 국토의 경계로 따져 본다면 오히려 거란의 동경 (지금 중국의 요양 시)도 전부 우리 고려 땅이라 할 수 있소. 그런데 어찌 영토를 침범한 것이라 하시오.”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의미로 고려라 정한 것과 서경이 고구려 옛 수도인 평양이었다는 점을 들어 고려가 진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정면으로 맞선 것입니다.

 

그러나 소손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이유를 들어 항복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압록강의 안팎 지역은 원래가 우리 고려의 땅이었소. 그런데 지금 여진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고 있어 간사한 짓을 하므로 길이 막히고 그곳을 지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소. 거란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다 여진 때문이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 고려의 옛 땅을 되찾아 성과 요새를 짓고 길을 열게 만들면 어찌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지 않겠소? 장군이 만일 저의 말을 황제에게 전한다면 어찌 이러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소?” 이렇게 말하며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려면 압록강 동쪽의 땅을 고려에게 넘겨주라고 요구했습니다. 서희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함을 밝힌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 고려와 거란의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는 여진족 평정 문제까지 들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소손녕은 서희의 말과 기개에 탄복하여 군사를 철수하였습니다. 그 후 994년부터 3년 동안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 · 귀화진 · 곽주 · 귀주 · 흥화진 등에 강동6주 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향권을 압록강까지 넓혔습니다. 이런 일들은 서희와의 담판에 따른 거란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외교 담판의 비밀

서희의 외교 담판에서 소손녕과 서희가 주고받은 말에는 대놓고 말하지 않는 서로의 속내가 담겨있습니다. 거란은 송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 고려는 거란이 무섭고 두렵지만 이 담판에서 지면 심하게는 멸망까지 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대담함이 있습니다. 서희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거란의 약점을 찔러주며, 고려의 입장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거란과 고려가 교류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거란에게도 유리한 점을 드러내어 소손녕을 설득했습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은 고려 전기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는 거란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강동6주를 확보하여 영토를 넓혔습니다. 또한 거란과 고려는 국교를 맺고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고, 고려는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서희는 이런 외교적 성과를 이끌어낸 공로로 성종으로부터 크게 칭찬받았습니다.

 

서희는 외교 담판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도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시와 문장을 잘 썼으며, 음악과 춤에도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시와 음악으로 성종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종의 친구이자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성종은 서희를 많이 신뢰하고 존경했으며,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서희는 고려 전기의 문화와 외교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그는 용감하고 똑똑하며 예술적인 감각도 가진 인재였습니다. 그의 외교 담판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아있는 위대한 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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