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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문벌과 무벌이라는 두 가지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문벌은 과거제를 통해 관직에 오르는 문신들로, 정치와 문화를 주도했습니다. 무벌은 군사적인 역할을 하는 무신들로, 문벌에 비해 낮은 지위와 대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정치와 사회는 여러 가지 모순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토지의 부당한 장악, 군인들의 경제적 곤궁, 왕권의 약화, 문신들의 탐욕과 향락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신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지위를 되찾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무신정변입니다.

 

무신정변의 배경

무신정변은 1170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고려 의종 24년 음력 8월 30일에 상장군 정중부와 이의방, 채원, 이고, 이의민 등의 휘하 장수들이 보현원에서 일으킨 쿠데타입니다. 이 사건은 무신들이 주도한 정변이었기 때문에 무신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 문벌귀족들의 지나친 권력 독점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문벌귀족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조화와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광종이 왕권을 지나치게 강화했을 땐 성종이 신하들의 위신을 좀 주었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문벌귀족들의 권력만 강화되었으니 완전히 균형이 깨지고 오랫동안 문신들의 그늘에 가려 햇빛을 보지 못했던 무신들이 들고일어나게 됩니다. 고려는 기본적으로 무신들을 차별하고 멸시하였습니다. 무신들을 뽑는 무과도 없을뿐더러 무신들이 승진할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은 정 3품 상장군까지였습니다. 이에 비해 문관은 1품까지 가능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전쟁터에서도 최고 지휘관은 문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희, 강감찬도 문신 출신입니다. 여기에 하급군인들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불만이 많은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이 바로 무신정변입니다.

 

둘째, 오병 수박희가 뭐길래?

의종은 어릴 때부터 오병수박희라는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종격투기와 비슷한 운동입니다. 왕이 되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스포츠에만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오병수박희를 열어서 무신들끼리 대련을 시키고 잘하는 무신은 파격적으로 승진을 시켰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미천한 출신이었다가 훗날 무신정권의 주역이 되는 이의민 같은 인물도 발탁이 됩니다.

 

무신정권의 시작

무신정변은 의종 24년 음력 8월 30일 보현원에서 발생했습니다. 당시 의종은 대소신료와 함께 보현원으로 행차했는데, 그를 호위하던 견룡군과 순검군의 군사들 중 일부가 이미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장군 정중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정중부는 다음날 왕이 일정대로 보현원으로 놀러가면 역모를 진행하지만 의종이 노는 걸 멈추고 궁으로 환궁하면 역모를 하지 않겠다고 두 사람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인 음력 8월 30일 의종은 다음 유람지인 보현원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 오문 근처에서 한 공터를 발견하자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를 열게됩니다. 오병수박희는 수박무술로 싸워 승부를 겨루는 일종의 무술대회로 승리자에게 상품과 승진이 걸린 행사로 당시 의종이 김돈중 등의 조언과 주변 분위기로 무신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무신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 상품과 승진을 건 오병수박희를 연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게 오병수박희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순탄하게 진행되었으나, 당시 환갑이 넘었던 대장군 이소응이 경기에서 패배하자 초급 문관에 불과한 기거주 한뢰가 느닷없이 자기보다 나이나 품계가 훨씬 높았던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비록 당시 고려가 무신을 천대하는 문화가 있었으나, 나이나 품계가 훨씬 아래인 한뢰가 무신의 최고위직인 대장군 이소응을 구타하고 모욕하는 명백한 하극상이 벌어졌는데 왕인 의종은 한뢰를 처벌하지 못할망정 도리여 이런 하극상을 보고 박장대소를 하고, 여기에 하급 문신인 좌부승선 임종식과 지어사대사 이복기는 도리여 이소응을 욕하는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이에 상장군 정중부가 하극상을 벌인 한뢰를 비난하지만 의종은 정중부를 말리고 한뢰를 처벌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갑니다. 이런 상황에 무신들은 제대로 분노했으며 이런 상황을 본 무신과 군사 대부분이 보현원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170년 음력 8월 30일 해질녘 혼란스러운 오병수박희를 마치고 의종 일행과 호위 무신들은 보현원에 도착합니다. 보현원에 도착하기 직전 이의방은 의종을 호위 중이던 순검군을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보현원에 배치한 뒤. 그리고 의종이 쉬러 보현원에 들어가자 무신들은 문신들을 급습해 임종식·이복기를 먼저 보현원 문 앞에서 죽여버리고 수박희 사건을 저지른 한뢰는 의종의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었지만 이고가 의종 앞에서 칼을 들고 협박하여 끌어내었고 결국 한뢰를 살해합니다. 그 외에도 다수의 문신들을 살해했고, 일부 무신들도 반란을 거부하다가 다수 살해당합니다. 한편 25년 전 정중부를 모욕했던 김돈중도 좌승선직위로 보현원 행차에 따라온 문신이었는데 이미 전부터 무신들의 불만을 간파하여 의종을 설득하던 김돈중은 자신의 예상대로 보현원에서 사건이 벌어지자 감악산으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반란이 끝난 뒤 시종의 밀고로 잡혀 죽습니다.) 김돈중이 도망친 것을 알게 된 무신들은 태자를 중심으로 반격할 것을 걱정하며 개경으로 정찰병을 파견하여 사태를 살폈는데 김돈중이 개경에 없다는 보고를 받았고 반격이 없을 것을 확신한 무신들은 별동대를 파견해 개경을 점령하고 문신들을 학살합니다.

 

무신정변 이후, 끝없는 권력다툼

얼마 안되어 이의방이 같이 무신의 난을 일으킨 이고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문신에 이어 무신까지 제압한 이의방은 권력을 잡고 무신들의 회의기구인 중방에서 나랏일을 논의하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문신 출신의 김보당은 내쫓긴 의종을 거제도에서 데려온 후, 왕위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지만 정중부에 의해 진압당하고 이의방은 더욱더 거칠 것이 없어졌습니다. 야심을 숨기고 있던 정중부는 서경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반란을 진압하며 이의방까지 제거하게 됩니다. 정중부는 권력을 앞세워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정중부에게 화가 난 젊은 장군 경대승은 군사를 이끌고 대궐로 가 정중부와 정균을 죽였습니다. 경대승은 늘 자신의 신변을 걱정하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도방'이라는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천민 출신의 이의민을 불러 자신의 곁을 지키도록 하였고 이의민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런 도중에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가 이의민의 아들에게 감정이 상하는 일이 일어나자 최충헌 형제는 이의민을 제거하고 명종 폐위 후 신종을 왕으로 세워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최 씨 가문에서 권력을 대대로 잡아 고려를 마음대로 주물렀습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의 노력들이 있었지만 고려는 결국 무신정변이라는 큰 사건을 맞아 쇠퇴하여 몽골(원)의 부마국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권력또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깨달음이 있었던 무신정변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즐겁게 읽으셨길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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